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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획자가 될 것인가

xeaxonx 2024. 7. 7. 22:00

<컴공생이 기획자를 꿈꾸기까지>

나는 컴퓨터공학과 3학년 학생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처음부터 컴공과에 올 생각은 단 1도 없었다. 고등학생 때 나는 프로그래밍을 싫어하는 쪽이었다. 정확히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정보' 교과목에서 파이썬을 공부할 때는 성적도 괜찮게 나오고 나름 잘 맞는 줄 알았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프로그래밍' 교과목에서 C++를 공부하니 아니었다. 진로 선택과목이라 같이 듣는 친한 친구들이 없기도 했고, 엄마의 등에 떠밀려 수강한 거라 큰 의지도 없었으며, 기본적인 연산자도 어려워했고, 그냥 프로그래밍 수업이 있는 요일은 오지 않길 바라는 지경이 되었다. 이랬던 내가 재수를 하며 어찌저찌 컴공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교 1학년 2학기, 첫 프로그래밍 과목으로 C를 배웠다. 수업은 날려 들었다. 성적에 대한 기대 역시 없었으며, 시험 전 날 덕수궁에 놀러갔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나는 프로그래밍을 외면하는, 회피형 학생이었다. 학점 또한 좋지 않게 나왔지만, 1학년 때는 필수교양이 모두 A+인 덕에 나쁘지 않은 총 평점을 유지할 수 있었다. 2학년 1학기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JAVA를 다루는 과목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JAVA와 더 잘 맞은 덕분에 밀리지 않고 학습할 수 있었고, 다른 과목들 또한 열심히 공부해 4.3 만점에 4점대라는 역대 최고의 평점을 받았다.
 
2학년 2학기가 되었다. 동아리 비스무리한 곳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웹개발 공부를 시작했다. HTML, CSS부터 React, Mongo DB, Node.js까지. 컴퓨터구조 등의 전공 과목으로 힘들어하던 나에게 웹 공부는 독이 되었다. 일단 과제를 해야 하니까 하긴 하는데, 영혼 없이 코드를 따라치기만 하는 나를 볼 수 있었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보면 타이밍이 안 좋았던 것 같다. 전공 과목이 갑자기 너무 어려워져서 버거워하는데, 웹 공부는 나에게 부가적인 것이었기에 여기에 노력을 들일 힘이 없었다. 또한 단기간에 너무 많은 것을 배워야 했기에 의지가 한풀 꺾였다.
웹개발 과제에는 클론코딩이 많았는데, 강의 영상이 3~4년 전 거였다. 프로그래밍 언어는 그 사이에 이미 많이 바뀌어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문법들이 많았다. 이때 좀 현타와 짜증이 동시에 왔다. 프로그래밍 시장은 계속 바뀌는데(문법뿐만 아니라 많이 사용되는 프레임워크 등이) 나처럼 게으르고 코딩 공부에 큰 노력을 들일 생각이 없는 사람은 이 바닥에 발을 못 내디 것 같았다. 지피티에 의존하는 나를 뽑아줄 회사도 없겠고, 이미 코딩 잘하는 사람들도 정말 많으니 나는 이 프로그래밍 시장에서 가치가 없겠구나. 
 
전과도 알아보고, 코딩 울렁증이 심했을 시절, 에타 컴공 과게시판에 컴공이 갈 수 있는 비개발 직무에 대해 물어보았고, 이렇게 어쩌면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도피성으로 찾은 곳이 기획이다. 사실 도피성으로 찾은 곳이지만 중고등학교 친구들이 모두 알 만큼 나는 문과적인 성향이 강하고, 늘 문과 직무에 관심이 있었고, 그렇다고 전공을 아예 살리지 않는 직무도 아니기에 나에게는 최적의 직무였다. (고등학교 때 이과이긴 했으나 종업식 날 문과 과목들 교과우수상을 받는 내게 담임선생님조차 나는 문과 갔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하셨을 만큼 문과 성향이 강했다. 내가 이과 공대 컴공에 지원한 건 오직 취업 하나뿐..)

생각해보니 1학기 때 수강했던 전공 과목 중 기획을 하고 프로토타입을 설계했던 팀플 과목을 가장 재밌어 했다. 평소에 만들고 싶은 웹, 앱 아이디어도 꽤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내가 기획을 해야 하는 여러 이유들을 찾았다. 기획자나 PM 관련 영상과 책도 찾아보고, 3학년 때에는 꼭 개발 동아리에 기획 파트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분야는 신입을 거의 뽑지 않는다 하여 진로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되나 잠깐 고민도 했지만, 못할 건 없을 것 같았다. 겨울방학에는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프론트엔드 개발 공부를 재개하기도 했는데, 전보다는 개발에 흥미를 훨씬 더 붙였지만 여전히 조금이라도 난관에 부딪히면 바로 지피티에 물어보는 나를 보니,, 개발을 업으로는 절대 삼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개발을 완전히 배제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짐했다. 개발을 할 줄 아는 기획자가 되자!
 
3학년 1학기를 마친 현재는 컴공과에 온 것을 더이상 후회하지 않는다. 2년간의 '컴공 괜히 왔어' 무새는 끝났다. 학년을 거치며 정보통신공학 등 여러 CS과목들에서 흥미를 느끼니 오히려 잘 왔다고 느낀다. (코딩 과제가 있는 과목을 기피하는 건 여전하지만..) CS 지식 및 웹개발을 아는 컴공 출신의 기획자라면 다들 반기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어떤 기획자가 될 것인가>

이번에 현장실습 면접을 스타트업에서 봤는데, 컴공생이 UX/UI를 다루는 기획 직무에 지원한 것을 신기해하셨다. 면접관분들도 개발을 할 줄 아는 컴공생이 기획하는 데에는 분명 메리트가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어쩌면 이 분야에서는 비전공자이니, UX/UI에 대해 부족함이 있을 거라 하셨다. 이에 대해 어떻게 공부할 거냐에 대해 질문하셨고, 당시의 나는 유튜브로 공부한다고 얼렁뚱땅 대답했으나 이 답은 아직 고민 중이다. (UX를 다루는 교과목을 수강하고 싶기는 한데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모르겠어서, 일단 많이 많이 보고 연구해보는 것이 최고같다.)
 
지금은 개발 동아리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기획자로 참여 중이다. 이것이 나의 기획자로서의 첫 프로젝트인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어렵게 흘러가고 있다. 설계해둔 와이어프레임이 디자인 과정을 거쳐 조금 방향이 달라지기도 하고, 플로우가 바뀌고, 이것이 당연하게 개발에도 영향을 미치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소통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IT 프로젝트는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장이다. 기획자가 디자인의 전문용어를 잘 모르고, 디자이너가 기능 구현에 대해 잘 모르는 것처럼, 서로의 분야에 대한 지식의 깊이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이해하도록 백그라운드 정보를 전달하고, 조금이라도 애매한 점은 상호 질문을 통해 답을 얻고, 모두가 각기 다르게 이해하지 않도록 한 자리에서 다같이 의견을 공유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서로 다른 세 파트가 동일한 결과물을 내기 위해 달려나가야 하니까. 결국 프로젝트의 뼈대는 기획에 있고, 기획자로서의 의사소통이 중요함을 많이 느껴서, 효과적으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기획자가 되고 싶다.
 
그래서 컴공을 전공하는 것이 현재의 프로젝트 기획 그리고 팀원들과의 소통에 유리하게 작용하느냐 묻는다면, 현재로서는 잘 모르겠다. 아직까지는 개발에 대해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기도 하고, 프로젝트 경험도 많이 부족해서 더 그런 것 같다. 어쩌다 보니 내가 동아리 비스무리한 모임에서 개발 공부를 소홀히 할 수가 없는 지위를 가지게 되었기에, 그리고 당장 다음 학기부터 프론트엔드 개발자로 졸업 프로젝트에 참여해야 하기에, 개발 공부를 좀 열심히 할 생각이다. 어쩌면 주객전도가 되어 기획보다 개발 공부에 치중하게 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한데, 나는 기획과 개발 둘 다 놓칠 수 없는 '기획하고 싶은 컴공생'이기 때문에 공부를 2배로 해야 한다. 기획 면에서도 아직 스스로 많이 부족한 것을 알고 있기에, 어떻게 해야 사용자 친화적인 인터페이스를 설계할 수 있을지 공부해볼 생각이다. 이렇게 공부를 하다보면 언젠가는 모두가 같이 일하고 싶어 하는, 소통이 잘 되는 '개발할 줄 아는 기획자'가 되어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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